복음 중심 공동체
1과 공동체를 위한 창조
읽을거리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 창조되었다
활동 개인주의의 다섯 가지 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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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위해 창조되고, 공동체 안에서 구원받다
왜 '공동체'가 가장 중요한가?
기독교인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전도 캠페인, 성경 공부, 혹은 개인적인 경건 생활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신학자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은 우리에게 놀라운 통찰을 제시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공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바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뉴비긴의 관점을 더 발전시켜 보면, "예수님은 책을 쓰지 않으시고 공동체를 만드셨다"는 도발적인 명제에 다다릅니다.
우리는 보통 복음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우리를 보지 말고 성경을 보십시오"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은 당신이 세운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세상이 복음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결국 우리의 함께하는 삶, 즉 우리의 공동체가 바로 복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무대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서를 통해 우리가 함께 탐구해야 할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함께하는 삶은 복음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경험에서부터 시작하여 관계와 공동체의 본질을 깊이 파고들어 가보고자 합니다.
1부: 관계를 향한 보편적 갈망
신학적인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사실, 즉 일반 계시를 통해 공동체의 필요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깊은 관계를 갈망할까요?
이 보편적인 경험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공동체에 대한 성경적 진리를 더 깊이 깨닫는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사례 분석: 고립의 고통
2009년 3월 30일 자 '뉴요커(The New Yorker)' 매거진에는 바비 델루카(Bobby Della Luca)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는 보스턴 지역의 악명 높은 도둑으로, 1993년 탈옥 시도 후 최고 보안 등급 교도소에서 5년간 독방 감금을 선고받았습니다. 그의 경험은 인간에게 관계가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처음에 델루카는 독방 생활을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제 석방될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라디오와 TV를 볼 수 있었으며,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인내심이 강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규칙적인 사회적 접촉이 사라진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그는 정신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혼잣말을 하고, 좁은 방 안을 강박적으로 몇 시간씩 서성였습니다. 곧이어 공황 발작이 찾아왔고, 벽의 색깔이 변하는 환각을 보았습니다. 간수들이 순찰하며 문을 여는 소리, 옆방 수감자들이 내는 소리 등 일상적인 소음에도 극심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1년쯤 지나자 그는 TV 속 인물들이 자신에게 직접 말을 건다는 망상에 시달렸습니다.
이 기사는 수개월, 혹은 수년간의 완전한 고립을 겪은 많은 수감자들이 점차 어떤 행동을 시작하거나 목적을 가지고 삶을 꾸려나가는 능력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극단적인 경우, 그들은 사실상 식물인간 상태(catatonic)에 빠지기도 합니다.
사례의 의미: 관계는 '필수 요건'이다
'뉴요커' 기사는 다음과 같은 핵심 명제로 시작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입니다. 단순히 교제를 좋아한다는 사소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단순히 정상적인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필요합니다."
바비 델루카의 사례는 지역과 문화를 초월하는 이 보편적인 진리를 증명합니다.
모든 인간은 고립을 고문으로 경험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관계와 상호작용이 단순히 있으면 좋은 '선호'의 문제가 아님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필수 요건'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교류 없이는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속적 설명의 한계
그렇다면 왜 인간은 관계를 이토록 필사적으로 필요로 할까요?
세상은 보통 '자연 선택'과 '진화론적 이점'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합니다.
인간이 무리를 지어 살 때 생존에 더 유리했기 때문에, 관계를 맺으려는 본능이 유전자에 각인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설명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관계를 '유용성(utilitarian)'의 관점으로 축소시킨다는 점입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관계는 와이파이(Wi-Fi)나 에어컨처럼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을 뿐,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부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직감적으로 압니다. 관계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세속적인 설명은 왜 우리가 유용성과 상관없이 관계 그 자체를 갈망하는지, 왜 고립이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지에 대해 충분한 답을 주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단순히 유용성 때문에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관계 맺는 존재로 '설계'되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 깊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이제 성경으로 눈을 돌려보고자 합니다.
2부: 공동체를 위해 창조되다 -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
인간의 깊은 관계적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신학적 답변은 성경의 첫 장, 바로 창세기 1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왜 공동체를 갈망하는 존재로 만들어졌는지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인류의 시작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창세기 1장 26절 분석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중, 인류를 만드시기로 결정하신 순간은 다른 피조물의 창조와는 구별되는 특별한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창세기 1장 26절
이 짧은 구절에는 우리의 관계적 본질을 설명하는 두 가지 매우 중요한 단서가 담겨 있습니다.
1. 복수 대명사 ('우리')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단수가 아닌 '우리'라는 복수로 지칭하신다는 점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은 유일한 한 분이심이 강조되는데, 왜 여기서는 복수형이 사용되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 즉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인격으로 존재하시는 관계적인 분이심을 암시하는 중요한 실마리입니다.
2. 형상 ('첼렘')
두 번째 단서는 '형상'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첼렘(Tselem)'은 구약의 다른 부분에서는 주로 '우상(idol)'을 번역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는 놀라운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 구약 주석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야훼께서는 자신을 위해, 자신에 의한 우상을 만드시는 신적 장인으로 자신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우상이 바로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어떤 형상으로든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지만, 창조의 시작점에서 친히 자신을 위한 '살아있는 우상'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가장 가깝게 대리하고 드러내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삼위일체와 관계의 연결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의 이성으로 완벽히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한 신학자가 재치 있게 말했듯이, "삼위일체를 부정하면 영혼을 잃을 것이고, 이해하려 하면 정신을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이해의 대상을 넘어, 우리 자신과 관계의 본질에 대해 깊은 진리를 알려줍니다.
•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분이십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 안에서 완벽한 사랑과 교제를 누리셨습니다.
• 우리가 관계를 갈망하는 것은 그분의 형상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관계적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우리 역시 관계 안에서만 온전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외로워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미 내재된 사랑과 기쁨, 교제가 너무나 충만하여 그 '흘러넘침'으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그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그 갈망의 뿌리는 이처럼 깊고 신성한 곳에 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공동체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관계적인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완벽한 조화를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일상적인 관계는 춤보다는 전쟁터처럼 느껴질 때가 많을까요?
그 해답은 하나님의 완벽한 설계에 파괴적인 마찰을 일으킨 비극적인 사건에 있습니다.
3부: 공동체의 파괴 - 죄의 영향력
우리가 공동체를 위해 창조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왜 현실의 관계 속에서는 끊임없는 갈등과 오해, 상처를 경험하는 것일까요?
그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죄'입니다.
창세기 3장은 죄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 질서, 특히 관계의 질서를 파괴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타락 사건의 재구성
창세기 3장은 뱀이 여자에게 다가와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하며 유혹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질문에 여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이야기하지만,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며 오히려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결국 여자는 그 열매를 따 먹고, 곁에 있던 남편 아담에게도 주어 함께 먹게 됩니다.
죄의 첫 번째 결과: 관계의 단절
죄가 세상에 들어온 직후 나타난 첫 번째 결과는 놀랍게도 '관계의 단절'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7절은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고 기록합니다.
이전까지 그들은 서로에게 완전히 열려 있었고,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서로가 자신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노출감과 취약함을 느끼고, 급히 몸을 가리기 시작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즉각적으로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에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죄의 심화: 숨음과 비난
관계의 파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시며 "네가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고 물으셨을 때, 아담의 대답은 충격적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답합니다.
그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대신, 하나님과 여자를 동시에 비난하며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주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 여자가 열매를 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여자 역시 뱀을 탓하며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신뢰와 사랑으로 가득했던 최초의 공동체는 죄로 인해 순식간에 숨음, 비난, 분열의 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죄의 마찰' 비유
죄가 우리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자동차 엔진을 떠올려 봅시다.
엔진 내부의 수많은 금속 부품들이 원활하게 움직이려면 반드시 윤활유, 즉 엔진 오일이 필요합니다. 윤활유가 없으면 부품들 사이에 엄청난 '마찰'이 발생하여 서로를 갉아먹고, 결국 엔진 전체가 망가지게 됩니다.
죄가 바로 우리 관계 속의 '마찰'과 같습니다.
• 누군가 우리에게 거친 말을 하면, 우리도 똑같이 거칠게 응수합니다.
• 누군가 우리를 섭섭하게 하면, 용서하는 대신 원한을 품고 잘못의 기록을 쌓아둡니다.
• 누군가 우리를 비판하면, 겸손히 받기보다 방어적인 태도로 자신을 보호하려 합니다.
• 누군가 용서를 구해도, 미묘한 방식으로 벌을 주어 우리의 호의를 다시 얻도록 만듭니다.
이 모든 깨어진 관계의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소외가 우리의 모든 수평적 관계 속에서 마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파괴적인 마찰을 해결하고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킬 윤활유는 과연 존재할까요?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을 복음 안에 마련해 두셨습니다.
4부: 공동체 안에서 구원받다 - 복음의 화해시키는 능력
공동체를 파괴한 죄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 '를 위해'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 '를 향해' 구원하십니다.
에베소서 2장은 복음이 어떻게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는지를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에베소서 2장의 배경: 분열과 소외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1-12절에서 복음이 오기 전 우리의 상태를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 사회적 분열: 당시 사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거대한 장벽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은 선민으로서 '할례파'라 불렸고, 이방인들은 '무할례파'라 불리며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들은 서로를 적대시하는 두 개의 집단이었습니다.
• 영적 소외: 더 깊은 차원에서,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복음의 극적인 전환
그러나 13절에서 바울은 극적인 전환을 선포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 구절의 두 표현은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피로':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희생을 통해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
복음은 단순히 개인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18절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모든 사회적, 영적 장벽을 허무시고 완전히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여기서 '둘(both)'과 '하나(one)'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교차시키며 복음의 역동성을 드러냅니다.
• 화평이 되신 예수님: 그리스도는 친히 우리의 화평이 되셔서,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둘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 적대감의 벽을 허무심: 율법 조문으로 나뉘었던 두 집단 사이의 '중간에 막힌 담', 즉 적대감의 벽을 자신의 육체로 허무셨습니다.
• '한 새 사람'의 창조: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두 그룹을 합친 것이 아니라, 이전의 정체성을 초월하는 완전히 새로운 인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 하나님과의 화해: 십자가를 통해 두 그룹 모두를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둘과 하나, 둘과 하나'를 오가는 수사법을 통해, 복음이 어떻게 서로 다른 두 그룹을 화해시켜 하나의 새로운 몸으로 빚어내는지를 능숙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재 진행형 사역
이 위대한 구원의 사역은 과거의 단회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22절에서 이 진리가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설명합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에베소서 2장 22절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 화해했지만, 동시에 여전히 '함께 지어져 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하나의 공동체로 계속해서 빚어가고 있으며, 이 사역은 지금도 역동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은 죄로 인해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모든 수평적 장벽을 허물어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능력입니다.
이 위대한 신학적 진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공동체에 어떤 실제적인 소망과 비전을 제시할까요?
결론: 우리 공동체를 향한 소망과 비전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이 공동체를 위해 창조되었고(창조), 죄로 인해 그 공동체가 파괴되었으며(타락), 복음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구원받았음(구속)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위대한 신학적 진리는 단지 교리적 지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공동체를 향한 구체적인 소망과 비전을 제시합니다.
1. 더 깊은 공동체를 향한 '갈망'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아름답고 활기찬 공동체를 향한 거룩한 갈망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피상적인 관계에 안주하곤 합니다. 주일에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가끔 함께 식사하는 수준의 관계 말입니다. 마치 축구팀이나, 운동하는 헬스클럽, 혹은 동네 주민 모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저 '예수님을 믿는다'는 공통점 하나만 추가된 관계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는 세상의 그 어떤 모임과도 질적으로 다른 곳입니다. 죄로 인해 생긴 분열과 적대감의 벽이 복음의 능력으로 허물어지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새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모습을 통해 세상이 경이로움을 느끼는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세상이 주목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 되기를 사모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2. 깨어진 관계를 향한 '소망'
두 번째로, 우리는 복음이 가져다주는 소망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깨어진 관계가 있습니다. 가족과의 갈등, 혹은 다른 교우와의 불편한 관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관계에 대해 절망하며 포기하거나, 아예 무시하고 외면해 버립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절망 대신 희망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단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화해와 회복을 가져오는 능력입니다. 그 어떤 깊은 상처와 갈등도 복음의 능력 앞에서는 치유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이 우리 관계 속의 '마찰'을 해결하는 윤활유가 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가족'으로서의 교회
신약성경이 교회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비유는 '친구'가 아닌 '가족'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친구 관계는 선택적이며, 노력에 따라 깊이가 달라집니다. 어떤 친구와는 매우 가깝지만, 어떤 친구와는 시간이 지나며 멀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족은 다릅니다. 가족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소속의 문제입니다. 명절에 만나는 먼 친척과 매일 보는 형제처럼 친밀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이 나의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바로 이런 '건강한 가족'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의 모든 사람과 절친한 친구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서로를 대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가족 모임'을 보고 "이 가족의 아버지는 정말 놀라운 분인가 보다. 이 가족을 하나로 묶는 힘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나도 이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입니다.
우리의 함께하는 삶, 즉 공동체의 질은 세상에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봅시다.
"우리의 공동체는 복음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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